며칠째 눈이 내린다.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에도 그랬듯이, 올해에도 관악산은 눈으로 덮인다.
관악산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눈이 오면 큰일이다.
관악산의 북사면에 위치하였기에, 평지는 없고 비탈길만 가득하기에, 눈이 오면 별다른 방도가 없다.
걷. 는. 다.
우리 연구실은 학교 내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그리고 가장 정문에서 먼 곳에 위치한다.
고도가 꽤 높기 때문에 맑은 날이면 서울 전경이 눈 앞에 펼쳐져 연구할 맛이 난다.
정문에서 멀다고 했지만, 사실 그렇게 멀지는 않다.
연구실에서 녹두에 위치한 자취방까지 종종 걸어가곤 하는데, 정문까지 30분, 집까지는 40분이면 간다.
물론 이는 내리막길이라서 그런 것이고, 반대로 집에서 연구실까지 오려면 1시간은 족히 걸린다.
눈이 오면 더 길어진다.
어제도 오후께부터 눈발이 시작되더니 저녁쯤에는 쌓이기 시작하고,
결국 밤이 되자 우리는 고립되었다.
눈이 조금만 쌓이면 버스는 발길을 끊는다.
교내 순환도로를 따라 학교에서 운영하는 제설차가 끊임없이 제설을 하지만,
우리 연구실이 있는 신공학관까지는 안온다.
교내에서 가장 경사가 급한 곳이기 때문이다.
제설차도 버린 곳.
밤 11시가 넘어 연구실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세 연구원은 길을 나섰다.
형진. 수민. 나.
버스가 끊겨 집까지 걸어가야 하는데도, 다들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이라 그런지 눈이 반갑다.
눈발이 가로등에 비치자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서 휴대폰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데,
형진이는 포즈를 취해주고, 수민이는 손까지 흔들어준다.
그렇게 우리 셋은 비탈진 눈길을 조심히, 하지만 즐겁게 걸어내려왔다.
중간에 기숙사의 편의점에 들러 추위에 언 몸을 컵라면으로 녹였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시계는 1시를 가리킨다.
씻고, TV 좀 보고, 인터넷을 좀 하다가 눈길에 지친 몸을 이불 속에 뉘였다.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는다.
3시.
4시.
5시.
6시.
그래. 차라리 학교를 가자.
뭘한게 있다고 다시 씻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기온이 높은 탓일까... 인도와 차도는 눈이 거의 녹았다.
물론 그 주변에는 눈이 가득 쌓여있다.
7시에 5516 버스를 타고 학교로 들어섰다.
일출 전이었지만 박명의 힘을 빌어 창 밖의 설경을 즐기면서 오고 있는데,
버스가 좌회전을 한다.
분명, 직진을 해야하는 곳에서 좌회전을 한다.
"지금 눈 때문에 신공학관에는 안올라가요~ 여기서 내리세요."
제설차도 버린 신공학관은 결국 눈 때문에 버스를 만나지 못했다.
사실 새롭지도 않다.
눈이 많이 오면 훨씬 아래쪽인 학생회관에서부터 걸어오기도 했었는데,
오늘은 공대폭포까지는 올라왔으니, 오히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버스에서 내려 마치 설산을 등반하는 기분으로 신공학관으로 올라왔다.
올라오니 신공학관 정문 앞의 나무가 날 반긴다.
그냥 나무다. 예쁘지도 않고 특이하지도 않은 그냥 나무.
그래서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나무다.
하지만 오늘 하얀 옷을 걸치고 조명을 받으니 뭔가 멋져보였다.
옷발, 조명발이다.
그래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는데, 막상 사진으로 보니 그 감동이 덜하다.
예전에는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기도 했는데,
작년 7월에 차세대 연구센터에서 신공학관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로는 그런 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 7시 반에 연구실에 있는 기분이 신선하다.
할 일이 태산이고, 연구할 것은 태태산인지라 여유부릴 시간이 없지만,
아침 일찍부터 출근했으니 보상심리로 이렇게 일기나 남겨본다.
어제 오늘 내린 눈은 언제쯤이면 다 녹으려나.
다 녹기 전에 그 위에 새 눈이 쌓이겠지.
그렇게 몇 번 반복되면, 관악산의 눈은 모두 녹아 도림천으로 흘러가고,
기다리던 봄이 오겠지.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 '황사'와 함께...
- 2013. 2. 6. 눈 온 다음 날. 밤을 새고 연구실에 일찍 출근하여.